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해 <로보트 태권브이> 등 만화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면 항상 주제가를 피아노로 쳐봤다는 추희명 교수는 서울예고 피아노과에 입학했지만 성악과로 전과해, 졸업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추 교수는 이 이력에 대해 강요가 아니라 권유에 의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미국 줄리아드 스쿨(The Juilliard School) 출신인 데다 오페라에서 역할이 제한적인 메조 소프라노지만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추희명=‘카르멘’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정도로 카르멘 역을 많이 맡았고, 카르멘으로 대표될 만큼 그 역에 부합하는 독특한 목소리뿐만 아니라 음악 팬들을 사로잡는 매너와 연기력을 가지고 있다.

 

이화여대 음악대학 재학 시절 차세대 최고의 메조소프라노로 주목받았던 추 교수는 지난 4월 13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세 번째 국내 독창회에 대해 “최근 많은 분이 좋아해 주셔서 공연이 안정적”이라며 간단한 소감을 전했다. 자신을 팬이자 홍보실장이라고 소개한 남편 권경일 현직 검사는 독창회 반응에 대해 “열광적이었다”면서 “독창회는 재미있는 곡보다 자기 실력을 검증할 수 있는 학구적이고 예술적인 노래 위주로 부르기 때문에 쉽게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데, 이번 독창회는 템포가 빠른 곡을 선택해 학구적이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음색도 좋고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매너는 여유 있어 보이기도 했다”며 관객들의 반응을 전했다. 또한 “메조 소프라노는 음역대가 넓어서 여러 가지 소리를 내기 때문에 정말 재미있었다”며 쉬지 않고 극찬을 하며 애처가의 모습을 보였다.

공연 중 에피소드에 대해 묻자 이번에도 남편이 나서서 그의 친구에 대한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하루는 추 교수가 <카르멘>의 ‘하바네라’를 부르고 빨간 장미꽃을 관객을 향해 던졌는데, 친구의 이마에 맞고 뒤로 떨어졌다는 것. 결국 장미꽃을 안타깝게 놓친 친구가 굉장히 아쉬워했지만, 추 교수의 기를 받았는지 다음날 골프 치러 갔다가 홀인원을 했다고 한다. 남편 권 씨는 “아내 덕분에 밥을 얻어먹었다”며 즐거워했다.

검사 내정까지 받은 시기에 물을 챙겨들고 따라다닐 정도로 열정적이고 외조의 왕인 남편과의 첫 만남은 지인의 소개를 통해 이뤄졌다. 추 교수가 줄리아드 스쿨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 중에 서로를 알게 됐고, 서로 미국과 한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추 교수가 귀국할 때마다 만났다고 했다. 추 교수가 연애 당시를 떠올리며 “처음에는 몰랐는데 (남편이) 갈수록 촌스럽더라”고 하자 남편 권 씨가 허허 웃으며 “제가 촌놈입니다”며 “문경 촌놈으로 자라 아직도 촌스러워요”라고 말하는 것에서 추 교수를 향한 남편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추 교수는 2000년 6월 세종문화대극장에서 열린 공연 <카르멘>에서 주연을 맡으며 국내 무대에 데뷔했다. 이 무대의 주연을 발탁하기 위한 1999년 12월 세종문화회관의 첫 공개오디션에 해산을 일주일 앞둔 만삭의 몸으로 나타나 심사위원단의 만장일치로 역을 따낸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당시 주연 캐스팅은 대부분 추천이나 소개로 이뤄졌고 오디션으로 발탁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만삭의 몸으로 오디션을 보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덤덤하게 “공정한 오디션 자리가 있으면 당연히 해야 한다. 내 노래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추 교수는 노래를 부르고 나서 공연이 6개월 뒤인데 그 몸으로 할 수 있겠냐는 심사위원의 질문에 “해산하고도 연습시간이 충분하다”고 대답해, 당당하게 역할을 따냈다.

이를 시작으로 국립오페라단과 오페라 <카르멘>(카르멘 역), <피가로의 결혼>(케루비노 역), <라트라비아다>(플로라 역), <세빌리아의 이발사>(로지나 역), <호프만의 이야기>(니클라우스 역) 등에 수십 차례 출연하였으며, 특히 카르멘 역은 그녀만의 유연한 음색으로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로지나 역은 메조 소프라노로서 첫 주역을 맡아 국내 오페라사(opera史)에 한 획을 그었다.

또한 서울시오페라단, 대구시립오페라단, 고양 아람누리 등과 공연하였고, 2013년 대전예술의전당 기획 오페라 <아이다>(암네리스 역)의 모든 공연을 성숙한 기량과 뛰어난 카리스마로 완성도 높은 무대를 선사해,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싱가포르 국립오페라단과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케루비노 역), <호프만의 이야기>(니클라우스 역)를 공연한 프리마돈나로서 싱가포르의 국립오페라단에 한국 오페라의 우수성을 알렸다.

하지만 클래식은 본디 우리의 것이 아닐 뿐더러 우리나라에서는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다. 고급스러움으로 대변되는 클래식이지만 많은 사람이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할 터다. 클래식이 대중에게 더 다가가기 위해 관객을 즐겁게 해 주는 연기와 퍼포먼스도 필요하지 않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예전에는 성악가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규정을 스스로 엄하게 많이 정해놨다”면서 “하지만 경력이 쌓이고 자신이 생기니까 오히려 편하고 자유롭게 음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세계 최고의 공연예술대학인 줄리아드 스쿨 출신 중 성악에 관련된 사람이 아직 국내에는 많지 않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자 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인 피아니스트 김대진, 소프라노 홍혜경·박미혜 등이 있고, 메조 소프라노는 추 교수가 최초다.

추 교수는 “감사하게도 저명한 음악 평론가분들이 후하게 평을 잘해 주신다”며 겸손함을 나타냈지만 이어 “카르멘에 대해서 만큼은 ‘검증된 가수’라는 평이 많고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다”고 말해 실력에 대한 강한 자신감도 함께 보였다.

국내 정상에 오르기까지 추 교수는 규칙적인 생활을 고집해 왔다. 그녀는 “자정이 넘도록 잠자리에 들지 못하면 화까지 난다”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했다. 운동을 하는 것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한 것일 뿐이라며 노래밖에 모르는 ‘노래바보’임을 인정했다.

이런 추 교수를 닮아 자녀도 음악에 끼가 있을까 싶어 묻자 “애들이 아빠 닮아서 머리가 좋다”며 은근히 남편 자랑을 하고는 “피아노 학원조차 보낸 적이 없다”면서 “자신의 전공을 자식에게 시키는 부모가 있고, 시키지 않는 부모가 있는데, 나는 후자인 것 같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 노래 외에는 생각한 게 없다”고 말해 노래에 대한 열정만은 남달라 보였다.

“공부는 끝이 없는 것 같아요. 해 보고 싶은 것, 부르고 싶은 노래가 많고 무대에서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애들이 ‘내가 좋아, 노래가 좋아?’라고 물어보면 가끔 우스갯소리로 노래가 더 좋다고 하기도 해요.” 이 말을 들은 남편 권 씨는 “사람을 좋아해야 되는데 노래밖에 몰라 답답하다”며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아내 추희명 교수에게 서운했던 것과 원하는 것이 있는지 남편 권 씨에게 물었다. 그는 “나한테 잘하는 것은 바라지 않고 아내가 최고의 메조 소프라노가 되면 좋겠다”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고 다시 한번 홍보실장을 자처했다. 또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놔두는 게 외조인 것 같다”며 “지금도 전혀 터치 못한다”고 넉살 좋게 웃었다. 또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남편도 음악인의 영향을 받아 12년 동안 남성중창단을 하며 공연 무대에도 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