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3년 11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오후 청와대에서 공식 방한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러시아 경제, 한계를 드러내다

러시아는 1998년 외환 위기와 저유가로 인한 외환부족으로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한 바 있다. 당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물러나고 푸틴이 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후 유가 상승으로 러시아 경제는 살아났고, 5~7%대의 높은 성장률을 구가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은데, 지금도 국내총생산(GDP)의 25% 이상을 차지할 정도다. 러시아 정부도 이를 타계하려고 산업 구조 다변화에 애를 썼지만 취약한 제조업 기반, 부패와 관료주의는 이를 방해했으며, 해외 투자자들의 환심을 사는 데도 실패했다. 여기에 작년 우크라이나 사태가 터지면서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이 경제 제재에 나섰고 마침내 러시아는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총체적 난국)’에 빠지게 됐다.

▲ 지난 11월 11일 오전(현지시각) 중국 베이징 옌치후 국제회의센터(ICC)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세션1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함께 입장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말 연례 기자회견에서 루블화 폭락 원인을 서방 탓으로 돌렸다. 경제 위기를 맞이한 건 국제 유가 급락과 서방의 제재 같은 외부요인에 있다고 지적했다. 푸틴은 서방이 ‘신(新) 냉전’의 벽을 세우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막대한 ‘오일머니(Oil Money)’ 덕분에 러시아를 세계 8대 경제 대국(GDP 기준)으로 끌어 올리면서 국제무대에서 큰 소리를 쳤지만 이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게 됐다. 서방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추가 금융 제재를 통해 러시아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숨통을 틀어 쥘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 경기 침체에 따른 유가 하락은 러시아인들이 ‘짜르(러시아 황제)’로 받들고 있는 푸틴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됐다. 푸틴 대통령이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러시아 경제는 향후 1~2년 동안은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러관계, 북한이 변수로 작용

▲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지난 6월 이후 40% 이상 폭락하는 가운데 12월 19일 오후 서울 중구 광희동 러시아 거리가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할 때 올해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일단 러시아 경제 위기가 단기적으로 우리 기업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하지만 만약 디폴트(채무 불이행)가 선언되고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중앙아시아 국가와 신흥국들에게까지 그 파장이 미친다면 우리 경제도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물밑 협상이 한창인 한러 자유무역협정(FTA) 논의도 지연될 수밖에 없다. 경제가 어려운 마당에 양국 관계에 웃음꽃이 피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 간, 그리고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도 자연히 뜸해질 수밖에 없다. 90년대 후반처럼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기업마저 생겨날지 모르는 일이다. 특히 러시아 측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진행하고 있는 나진-하산 프로젝트 등 남북러 삼각 협력사업도 차질을 빚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작년 11월 러시아 석탄 4만5천 t이 나진항을 거쳐 국내로 처음 수입됐다. 나진-하산 프로젝트의 첫 시범 운송이자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첫 결실이었다. 러시아는 우리의 10대 무역 상대국으로서 그리 큰 비중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러시아와는 경제적인 부문만 봐 안 된다. 정치·외교적 고려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바로 북한이라는 변수 때문에 러시아의 경제 상황을 예의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해 북한과 러시아는 그 어느 때보다 사이가 좋았다. 언론은 ‘신(新)밀월’ 관계라며 떠들었다. 지난해 6월 양국이 루블화 결제를 실시하기로 합의하고 4개월 뒤 무역결제가 시작됐다. 나진-하산 철도 개보수 프로젝트를 마무리한 북한과 러시아는 지난해 10월 250억 달러(약 27조 5천억 원) 규모의 북한 철도 현대화 공사도 시작했다. 지난해 북한에 장관급 이상의 대표단을 북한에 가장 많이 파견한 국가는 러시아였다고 한다. 그만큼 북러 관계가 친밀해졌다는 이야기다.

현재 북한과 러시아가 처한 상황은 비슷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고,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다. 북한은 2013년 3차 핵실험 강행과 지난 해 중국통인 장성택 처형 이후 최대 후견국인 중국과의 관계마저 소원해지고 말았다. 든든한 우방이 절실히 필요한 북한으로서는 전략적으로 러시아와 가까워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경제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서방의 고강도 인권 압박을 피하려면 러시아의 도움이 절실하다. 반면 러시아가 북한에 접근하는 배경은 강한 러시아를 추구하는 푸틴 대통령의 ‘신(新)동방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아시아 중시 정책을 기치로 한반도와 그 주변국에서 영향력이 확대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동북아 지역에서의 목소리를 높이려면 북한을 정치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러시아의 북한 감싸기는 한반도를 넘어 미국과의 패권경쟁이라는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또 경제적으로는 러시아는 낙후한 극동 개발에 값싼 북한 노동력이 절실하다. 러시아는 극동 개발과 연계된 남·북·러 3각 협력 사업 실현과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관심을 갖고 있다.

5월 전승기념일 남북정상 참석 여부 주목

▲ 北 노동신문은 20일자 1면에 김정은 특사로 러시아를 방문중인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인 최룡해 당중앙위원회 비서가 18일 러시아 크레물린대궁전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며 보도하고 있다. (출처: 노동신문)

북한과 러시아 간 협력은 경제 분야를 넘어 정치·군사 등 다른 분야로의 협력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북러관계의 하이라이트는 5월 9일 전승기념일 행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이 김정은 제1위원장과 박근혜 대통령을 함께 초청했는데, 만약 남북한 정상이 초청에 응한다면 역사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김 제1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하게 되면 2011년 북한 최고 권력자에 오른 후 첫 외국 방문이 된다. 2005년 60주년 기념식에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등 53개국 정상들이 참석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도 참석했지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도 초청 받았지만 참석하지는 않았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아마 러시아를 가고 싶어 할 지 모른다. 자신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체제 안정화가 절실한 상황에서 북한 주민에게 자신이 진정한 의미의 최고 지도자임을 공식 선포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 내부사정이나 건강이 허락하지 않으면 참석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김 제1위원장의 참석 가능성과 관련해 일부 전문가들은 역대 북한 지도자들이 다자 행사에 참석한 적이 없고, 중국에 앞서 러시아를 찾는 것이 관례를 깨는 파격이라는 점에서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전망하고 있다. 김정은이 다자 회담을 꺼려한다면 러시아가 이를 배려해 북러 단독 정상회담이 이뤄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변수는 그 이전까지의 남북관계다. 보수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나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채택 구체화 등 북한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국면이 전개될 경우, 북한이 도발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남북관계는 다시 긴장 국면에 접어들게 되고, 국제사회의 비난이 빗발칠 테니 전승기념일은 러시아만의 잔치가 될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할 가능성은 반반이다. 2013년에 두 차례 한러 정상회담을 했으며, 한러 간 특별한 외교적 현안이 있는 것도 없다. 단순히 전승기념일 축하에 러시아를 방문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더욱이 김 제1위원장도 초청된 상황이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사안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우리 정부도 남북 간 직접 대화를 더 선호하는 모습이어서 러시아에서의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남의 집 잔치에 들러리를 가는 듯한 모양새는 좋지 못하고, 러시아가 남북관계 중재자 역할을 하는 인상을 미국이나 중국에 주는 것도 우리 정부로서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외교·안보 분야에서 비교적 좋은 점수를 받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집권 3년차 ‘빅 이벤트’로 남북 정상회담 카드를 사용할 수도 있다. 작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나온 ‘통일 대박론’이 국민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동력 회복의 계기이자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어찌됐건 우리 정부로서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동향 파악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러시아와 핫 라인(Hot Line)을 총 가동해야 한다. 그러면서 ‘북핵(北核) 불용’ 등 러시아가 그동안 보여준 북한에 대한 태도가 변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김정은의 돌출 행동을 막아 줄 안전장치로 러시아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당분간 러시아와 북한의 밀월 관계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역내 평화와 안정, 안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남북 대화와 경제 협력을 꼽고 적극 지지하고 있다. 러시아의 남북한에 대한 협력 강화 노력은 극동개발과 동북아에서의 정치적 갈등 완화, 세력균형 유지라는 국가적 이해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정부가 표방한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이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도 이해를 같이 한다. 우리 정부가 서방에 너무 치우치는 외교 노선만 취하지 않는다면 러시아는 언제나 우리 편에 서 있을 것으로 본다. 러시아가 올해 경제 위기를 슬기롭게 넘길 수 있도록 도울 부분은 도와야 한다. 90년대 국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때 러시아를 끝까지 떠나지 않은 기업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는 점을 이 시점에 다시 한번 회고할 필요가 있다.

남현호 뉴스Y 앵커 (전 러시아 특파원)  mjknews@mj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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